자신의 꿈을 펼치는 데 경제·금융 지식의 부재가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토지공개념은 현행헌법에도 스며든 내용
유시민이 '알쓸신잡' 경주편에서 황남길에 위치한 상가 땅값이 수십만원에서 불과 1년 사이에 천만원 이상 오른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두고 "인류 역사상 그걸 막을 방법은 없다"고 한 발언에 대해선 유감이다. 유시민이 소개한 헨리 조지가 부동산 투기를 종식할 해법을 '진보와 빈곤'에서 이미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생산성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진됨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토지소유자들이 사회가 만든 부를 지대의 형식으로 수탈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소유자들이 부당하게 약탈하는 지대를 정부가 보유세로 환수하면 경제적 풍요와 자유와 실질적 평등이 구현될 거라고 봤다.
최근 보도가 되고 있는 내용처럼 대기업들이 'Apple Way' 를 따른다고 가정해 보자. 미국식 주주자본주의가 실현되고 배당수익률은 고공행진을 지속하며 주가는 상승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자본시장을 통한 공정한 부의 재분배로 이어질 것인가? 유가증권 자본집중도가 극히 높은 한국에서는 결국 이 과실이 시총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상위 1.0%에게 돌아갈 것이며,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은 자기자본 이익률(ROE)을 최대한 높여 주주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고용을 줄이고 생산 아웃소싱의 비중을 늘려 나갈 것이다. 주주자본주의 의제의 실현과 공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꼭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트럼프의 선거 때 막말을 두고 유세 때와 당선 뒤는 다를 것이라든가, 미국은 제도화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므로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정신승리법'적인 전망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트럼프가 앞으로 얼마나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는 당분간 미치광이 트럼프, 깡패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강대국의 흥망사를 보면, 포용·개방적일 때 흥했고, 배제·폐쇄적일 때 망했다. 결국 미국도 그런 역사의 법칙을 피해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재명의 '국보세' 신설 제안을 '혁명적'이라고 표현한 건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다. 비대언론과 메인스트림으로부터 '세금폭탄'이라는 융단폭격을 당하며 노무현이 만든 종합부동산세가 가장 많이 걷힐 때 3조원에 미치지 못했다. 이재명이 '국보세'를 신설해 15조원을 걷겠다는 제안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인지 극명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재명이 용감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재명은 토지에 부과하는 보유세가 저항이 심한 세금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 같다. 국보세와 기본소득을 연계시킨 걸 보면 말이다.
시장경제에서 운이 크게 작용하는 까닭은 최초 몇몇 소비자들의 반응이 이후의 소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최초의 소비자들이 마음에 들어 하고 입소문을 좋게 내주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 입소문이 누적되면서 다른 소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작은 차이였던 것이 점점 커져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마태효과(Matthew Effect)라고 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마태복음 25장의 구절을 빗댄 것이다.
2007~2014년 사이에 부동산의 매매 및 임대로 인한 자본이득이 연평균 450조원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부동산의 매매 및 임대로 인한 자본이득이 얼마나 크냐면 2007년 같은 경우 국내총생산의 40%를 넘을 정도다. 특기할 점은 매매차익에 비해 임대소득(귀속임대료 포함)의 크기가 꽤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3년부터는 임대소득이 매매차익을 앞지를 정도다. 극심한 전세난과 월세위주의 임대차시장 재편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정당-노동조합-지식인 사회 전체가 '고용안전망-산업구조 고도화-구조조정의 패키지'에 대한 대안적 담론, 대안적 정책, 대안적 정치행위를 준비하지 못했고, 그 결과물로 오늘날 우리가 겪게 되는 것들이 정리해고 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자살,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고통이 예고된 하청-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그리고 서러움들이다. 이에 대해 그간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과 진보정당에 속했던 분들은 이 모든 것이 '자본의 분할통치 전략'이거나, 박근혜 정부와 재벌의 책임이라고 돌리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남 탓의 정치학'이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구매하지 말고, 지불하지 말자는 제안을 합니다. 시장 거래가 없으면, 자본주의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진한 방식의 싸움 전략입니다. 지갑을 열고 구매하라고 유혹하는 기업들의 광고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대기업들은 납품단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사업 낚아채기 등을 통해서 거래를 중지하고 있습니다. 순진하지 않은 대기업들이야말로 반자본주의 운동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부산의 D 조선업체는 본사 직원과 협력사 직원에 따라 통근버스의 좌석을 분리했습니다. 자동차 회사 G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름표 색깔을 달리 했습니다. 강남 S병원은 식권 색깔을 달리하였습니다. 자동차 회사 H의 지방 공장은 야간조 간식을 정규직에게만 주었습니다. 항의가 일자, 비정규직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다른 종류의 간식입니다. 안산의 H 업체는 회사창립일을 맞아 정규직에게만 특식을 제공했습니다.
롯데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최근 일어난 일은 그 자부심의 뿌리를 뒤흔든다. 삼성이 경영권 세습과정에서 벌인 인수합병 소동도 그 흔들림을 거든다. 자본주의니 주식회사니 하는 이야기는 겉치레였을 뿐인 듯하다. 그냥 돈 많고 나이든 이들이 금력과 권력과 완력까지도 독점하는 고령지배체제(제론토크라시)처럼 보인다. 특히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최종의사결정권자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어려움이 한국사회 수준을 수십년 뒤로 후퇴시킨다.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수많은 이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근대사회의 유산이 흔들리고 있다.
대한민국을 정확히 보려면 지대(rent)라는 현미경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대를 불로소득이라고 불러도 좋다. 건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장점 중 하나는 지대추구를 불온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지대는 다른 누군가 혹은 사회가 만든 부다. 따라서 지대를 독식하는 건 사회 혹은 타인이 만든 부를 노략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신분의 세습을 금기로 여기고, 상속이나 증여에 고율의 과세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지대를 특정집단이 독식하고 지대추구를 권장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건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이 지대추구 혹은 불로소득 공화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두 사례를 보자.
민간기업의 합병 문제를 국익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는 것부터 저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굳이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국익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이익입니다.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는 10% 넘는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인데, 국민연금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국민입니다. 그런데 지금 합병 비율은 자산 가치가 세 배인 삼성물산의 가치를 오히려 제일모직의 3분의 1 수준으로 평가해 산정했습니다. 당연히 삼성물산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지분 가치, 즉 국민의 이익을 매우 저평가하고 이재용의 지분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합병 비율을 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국익이라고요? 굳이 "국익 프레임"으로 보자면 지금 합병 추진 방식은 국민의 이익, 즉 국익을 희생해 이재용의 사익을 추구하는 합병안입니다.
나나의 '계속해보겠습니다'와 바틀비의 '안하고 싶습니다'는 각각의 말이 나오는 시공간이 너무 다른데다 정반대의 삶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어서 둘 사이를 관련짓는 것 자체가 어쩌면 엉뚱하달 수 있다. 나나의 말은 점점 망가져가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혼전에 임신한 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아이를 낳기로 하면서 스스로를 다짐하는 말이고, 바틀비의 말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확립되던 19세기 중엽 미국 월가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필경사(筆耕士)가 고용주의 모든 요청을 거절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 떨어진 소설 속의 두 말이 순식간에 마음으로 다가와 삶과 죽음, 지속과 멈춤의 감각을 고스란히 되살려놓은 것이다.